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사람들의 말이나 글이 예전보다 거칠고 엉성해졌다는 비판이 종종 들린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매체나 책에서 접하던 말과 글은 잘 다듬어지고 정선된 것이 많았던 반면, 이제는 작가나 방송인처럼 어문을 다루는 전문가 말고도 누구에게나 말과 글을 펼치는 장이 열렸다. 언어는 늘 의사소통만을 목적으로 하는 딱딱한 도구가 아니고 온갖 모양으로 빚으며 갖고 노는 고무찰흙과도 닮았다. 언어의 오용 안에서 뜻밖의 재미도 만날 수 있다.
언젠가 '컴퓨터에 문해하신 분들'이라는 복잡한 맞춤법 오류를 봤다. 그러니까 '문해하신'은 '문외하신'을 틀린 것인데, 웹을 찾아보니 '문해하신'으로 틀린 이는 적으나 '문외하신'은 꽤 많다. 다시 말해 문외한(門外漢)이라는 명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마치 형용사 '문외하다'가 있다고 착각해 관형형 '문외한'으로 여기고 이를 다시 '문외하신'으로 높이는 것이다. '문외한 사람, 문외한데, 문외해서, 문외하고'도 꽤 많이 보인다.
'무뇌한'이나 '무뇌하신', '무뇌해서'는 꼭 몰라서라기보다 무뇌(無腦)를 응용한 말장난도 많겠으나 '문외한 사람'이나 '문외하신'은 정말 몰라서 틀린 듯싶다. 그런데 파렴치(破廉恥)와 이의 파생 명사 '파렴치한(破廉恥漢)', 형용사 '파렴치하다'의 관계를 보면 '파렴치한'이 '파렴치한 인간'과 같으므로 형용사 '문외하다'도 있다고 혼동할 만하다. 무뢰(無賴)와 무뢰한(無賴漢)은 있으나 '무뢰하다'는 없는데 이를 관형형으로 잘못 쓰거나, 무례(無禮)와 '무례하다'는 있어도 파생 명사 '무례한'은 없는데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문외(門外)에 다시 문해(文解)가 섞여 마치 '문해하다'라는 형용사도 있다고 착각한 '문해한'이나 '문해하신'이라는 관형형도 드물게 보인다. 물론 이러면 의도와 반대가 된다. 예전에는 글자를 모른다는 '문맹'을 많이 썼고 그 반대말인 '문해'는 비교적 최근에 퍼졌기에 덜 익숙해서 헷갈릴 수도 있겠다. 영어도 illiteracy(문맹)부터 있었고 반대 개념인 literacy는 나중에 생겼다. 딴 언어들도 대동소이하다.
'맹자'에는 글자나 낱말에 매달려 글월의 말뜻을 그르치지 말라는 "不以文害辭(불이문해사)"라는 문구가 나온다. 요새들 이런 말을 모른다 어쩐다 같은 게 이른바 문해력 타령의 단골 소재다. 어휘력과 문해력이 다르지만 두 개념이 이어져 있고 어휘력도 중요하니 뒤섞는 거야 그렇다 쳐도 마치 글자, 낱말, 자구를 많이 알면 장땡인 듯 강요하면 문해력이 높아진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게 더 문제 아닐까 싶다. 좋은 음식만 실컷 먹는다고 건강해지지는 않듯이, 어휘든 지식이든 그저 양적으로 많이 안다고만 해서 질적으로 높은 지력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누구든 어떤 말을 틀릴 수 있다. 나도 그런 걸 가끔 지적한다. 하지만 적절한 맥락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말이나 글을 제대로 써야 바람직한 기자나 작가, 저술가, 학자, 방송인 등이 틀린다든가 하는 경우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문 사용의 문제점을 두루두루 짚고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런데 신경질이나 깔봄이 깔려 있을 때도 많다. 이런 것도 모르느냐고 다그치거나 몰라도 상관없다고 맞받아치며 서로 손가락질하기보다는 함께 손잡는 방향으로 가는 게 나을 것이다. 말과 글이 허상에 머물지 않도록 사람과 세상을 함께 잘 바라보고 살펴보는 이해력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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