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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묘백묘가 말처럼 쉬운 일인가

입력
2025.02.13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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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공격 직면하는 이재명의 실용
의지, 설득 없인 대선용 말잔치 전락
정치적 손해 감당할 자신은 있는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월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탈이념, 탈진영의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월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탈이념, 탈진영의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뉴스1

‘마오는 나라를 바꿨고, 덩은 인민을 구했다’는 중국 내 평가가 있다. 마오쩌둥은 봉건 사회를 사회주의로 탈바꿈했고, 그 과정에 굶주린 인민을 덩샤오핑이 살렸다는 의미다. 그 정책 철학이 '색깔이 뭐든 쥐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라는 덩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물적 토대 없이 사회주의 경제대국을 꿈꾼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은 1958년 시작됐다. 인민공사라는 거대 집단농장화가 감행됐고, 공업화의 쌀인 철강 생산을 위해 농가마다 고로가 만들어졌다. 모두의 재산은 누구의 재산도 아니듯 생산 비효율이 만연했고, 인민공사마다 부풀려진 생산량을 상부에 보고하는 사이 인민은 도처에서 기아에 쓰러졌다. 고로에선 쓸모도 없는 고철이 양산됐다. 벼 이삭을 훔쳐 가는 참새 박멸 지시로 천적이 없어진 메뚜기떼가 하늘을 덮었다. 대약진운동은 4,500만 희생자를 내고 61년 끝났다. 인류 최악의 인간실험이라는 평이 빈말이 아니다.

이후 일부 농촌에서 여러 농업생산 형태가 생겨나 당내 논란이 빚어지자 당 수뇌부인 덩은 62년 7월 중앙위원회에서 농업생산을 회복할 수 있는 형태를 채택하자며 흑묘백묘론을 처음 내세웠다. 곧바로 덩은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주자파'로 낙인찍혀 자아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 실패에도 사회주의의 이념적 구현에 경도돼 급진 좌경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오의 권력공고화를 위한 문화대혁명으로 덩은 두 번의 실각과 시골 트랙터 공장 하방도 겪었다.

마오 사후 권력을 쥔 덩이 78년 개혁·개방의 4대 현대화 계획을 내세워 실용노선을 구현하기까지 16년이 걸렸다. 한 예로 농업부문에선 인민공사를 폐지하고 농가가 초과 생산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하자 중국은 비로소 만성적 식량부족에서 벗어났다.

베이징 자금성 현판엔 마오 사진이 걸렸지만 G2로 우뚝 선 현대 중국의 건설자는 덩이다. 자본주의보다 더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바탕은 흑묘백묘다. 그의 실용노선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중심에 둔 통찰이 없었다면 사회주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중국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과 함께 조기 대선이 점쳐지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 흑묘백묘론을 앞세워 중도층 끌어안기에 나섰다. 실은 진보 가치뿐만 아니라 실용주의도 면면히 이어진 게 민주당 흐름이다. DJ가 서생의 문제의식과 함께 언급했던 상인의 현실감각이 대표적이다. 상인의 유연성이야말로 실용의 정수 아니던가.

노무현은 우군인 진보세력의 부단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FTA를 추진했다. 그걸 뚝심으로만 볼 수 없다. 충분한 검토와 사전준비를 강조했고, 과장과 왜곡 없이 정확한 정보 전달과 설명으로 국민 동의를 구하자고 했다. 그는 샌드위치 한국경제가 살아날 길은 개방과 시장 확대밖에 없다고 봤다. 좌우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라고 단언했다. 우군을 잃고 어쩌면 정권까지 내준 한 요인이 됐지만 대한민국과 국민의 경쟁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이 대표는 반도체 52시간 예외 등 실용노선이 당내외 비판에 직면하자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제 말 다르고, 오늘 말 다르다. "'몰아서 일하기 왜 안 되느냐'에 할 말이 없더라"는 수준에서 설득이 될 일로 여겼다면 순진하다. 신념이 있다면 사리에 맞게 토론하고 또 토론해보자고 했을 일이다. 이 대표 측은 노선 전환 후 좌우에서 공격받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 대표가 새겨야 할 대목은 "정치적 손해가 가는 일을 할 대통령은 나밖에 없다"는 노무현의 배포다. 화려한 수사와 말잔치에서 끝낼 일이라면 흑묘백묘는 내려놔야 한다. 대선용 탱자(귤화위지·橘化爲枳)가 될 바에야 그렇다.

정진황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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