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지지한 1933년의 독일
'민주공화국' 잃고, ‘전범국’ 낙인
민주주의, 힘들어도 올바르게 지켜야

지난 2024년 12월 4일 새벽 국회 본청 앞에서 진입을 시도하는 군인들과 시민들이 충돌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1932년 7월 독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230석을 얻어 제1당이 됐지만,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다. 히틀러의 총리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재임 1925~1934)은 그를 "보헤미안 하사관 출신"이라 부르며 경멸했고, 보수 정치인들 역시 극단적인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4석을 더 잃었고, 히틀러의 총리 임명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그러나 뜻밖에도 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다. 히틀러가 과격한 사상을 가진, 폭력적인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1933년 2월 27일 밤 9시, 영하 6도의 추운 베를린 밤하늘 아래서 한 젊은 신학도가 제국의회 건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2층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경위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의사당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범인을 쫓던 중 회의장에서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다. 키가 크고 창백한 그는 웬일인지 상의를 벗은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소지품은 공산당 문서와 네덜란드 여권뿐이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던 이 네덜란드 청년은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히틀러는 영국 특파원에게 말했다. "신이 허락하신다면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기를. 당신은 지금 독일 역사의 위대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나치 돌격대(SA)는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SA 본부, 빈 지하실, 버려진 창고로 끌고 갔다. '야생 수용소'라고 불린 그곳에서 잡혀간 이들은 구타와 고문과 살인을 당했다. 나치 돌격대는 유대인 법관을 잡겠다면서 법원도 습격했다.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 선전기관은 공산주의자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관공서 테러를 한다는 음모론을 확산시켰다. 히틀러는 긴급명령(Fire Decree)을 통해 언론·집회·표현의 자유를 정지하고 공산당과 반대파 정치인 4,000여 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의회 동의 없이 법 제정이 가능한 수권법(Enabling Act)을 발표한 뒤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1933년 독일인들은 나치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세력임을 알면서도 열렬히 지지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승전국에 대한 복수를 설파하는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 평화, 관용을 주장하는 정치인은 배척됐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던 그 순간,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민주공화국을 '강한 지도자'와 맞바꾸고 독일인들이 얻은 것은 역사상 최악의 인종 범죄를 저지른 전범국이라는 낙인이었다.
마치 역사가 반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하기 위해 특전사를 국회에 파견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입증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에 방첩사 군인을 보내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 1월에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잡겠다고 법원을 습격했다. 바이마르의 교훈은 민주주의란 올바른 정신으로 힘들게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 뒤로 굴러 독재로 돌아가버리는 ‘시지프스의 바위’와 같다는 것이다. 2025년의 한국이 1933년의 독일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제국의회 화재가 단독 범행이었는지 나치당의 조작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칼럼 내용은 <Benjamin Carter Hett, Burning the Reichstag: An Investigation into the Third Reich's Enduring Myste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4>를 주로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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