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파이로 프로세싱 공동 개발
원자력연-아이다호연구소 "변화 없다"
미국의 韓 민감국가 지정 후폭풍 지속
사전허가, 신원조회, 규모축소 등 우려
정부 "파악 중"... 기술외교 전략은 있나

이재웅 외교부 대변인이 13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 목록을 올린 데 대한 정부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 에너지부(DOE)가 ‘민감국가 리스트’에 한국을 추가하자 국내 과학기술계는 기술 및 인력 교류 차질 여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다행히 양국 원자력 연구기관 간 협력 등 대부분 연구 현장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분야에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를 주문했다.
16일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부 산하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와의 공동 연구가 큰 변화 없이 진행 중이다. 두 기관은 사용후핵연료(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한 뒤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파이로 프로세싱 기술 개발을 10년 이상 함께해 왔다.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기술이라 DOE 조치에 유의미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아직 현장에서 감지된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서 별다른 연락 없지만... 그게 오히려 불안"
파이로 프로세싱 기술 개발은 DOE 협조 없이 이뤄지기 어렵다. 연구에 필수인 특수 설비(핫셀)를 아이다호 연구소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채영 원자력연 원자력진흥전략본부장은 “우리 인력 한두 명이 아이다호 연구소에 상주하고 직접 오가는 인력도 많은데 이들에게도 현재까지 특별한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고 전했다.
DOE가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만큼 민감국가 지정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기술 분야로 원자력이 꼽힌다. 최근 주목받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이 제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는데, “SMR은 국가 차원보다는 민간 기업들과의 협력이 많은 만큼 DOE 조치가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라고 임 본부장은 설명했다.
다른 정부출연연구기관에도 의미 있는 변화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DOE 산하의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아르곤 국립연구소와 협력을 이어온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관계자는 “해당 기관들로부터 별다른 연락을 받은 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명시적, 직접적인 변화가 없더라도 공동 연구나 기술협력의 범위와 건수가 축소되는 식으로 영향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프로젝트 착수에 사전허가 조건을 걸거나 △방문할 때 신원조회를 엄격하게 하거나 △연구 참여 인원 또는 예산 규모를 줄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을 지연시키거나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상한다. 한국을 민감국가 목록에 올린 지 두 달이 넘도록 협력 상대 기관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게 오히려 불안하다는 시각도 있다.
"기초원천 기술 확보가 이래서 중요"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후 과학계에 국제협력 확대를 독려해 온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선 난감한 상황이 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러 부처와 협력해 대응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고 있다. R&D에 미칠 파장에 대해서도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직접적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이슈들이 있을지 파악 중”이라고 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정부가 원자력 외에 다른 분야로 영향이 미칠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AI와 반도체, 양자 같은 첨단기술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만큼, 미국 정부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전기전자공학 전공 교수는 “다음 타깃이 AI와 반도체가 될 수 있다”며 “미국에선 DOE가 과학기술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분야별로 기초원천 기술을 확보해 두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만의 기술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협상 카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쓴소리도 적지 않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핵무장론 때문에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활용마저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상욱 KIST 양자정보연구단 책임연구원은 “기술외교 차원에서 정부의 전략이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기자 now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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