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살인 심층 방송 기획한 두 언론인
'시사기획 창' 이승준 기자 "기시감 때문"
'추적 60분' 김민회 PD "너무 많이 죽어서"
통계 안 만드는 정부, 경각심 없는 사회
유족들만 "더는 희생 없어야" 입법 목소리
#. ‘죽어서야 헤어졌다.’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시사교양 창’이 지난달 27일 방송한 48분 분량의 다큐다. 제작진은 인천·경남 거제·경기 하남·충남 당진에서 일어난 교제살인 피해자 유족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2021년부터 최근까지 판결문을 분석해 교제살인의 패턴을 찾아내고, 안일한 경찰 수사와 법 공백 문제를 촘촘히 짚었다.
#. ‘헤어질 결심, 그후 - 2024 교제살인 보고서.’ 지난달 30일 KBS 탐사 프로그램 ‘추적 60분’이 방송한 48분 분량의 방송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교제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 방송은 탐사 프로그램에선 이례적으로 ‘19세 이상’으로 시청 연령을 제한했다. 피해자의 비명 등이 담긴 교제폭력 녹취록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이다. 방송은 교제살인의 사전 징후를 꼼꼼히 알려주며 무거운 경고를 던졌다.
KBS는 왜 사흘 간격으로 교제살인 방송을 내보냈을까. 보통 방송 주제가 겹치면 편성 날짜를 조정하지만 같은 주에 내보냈다. KBS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굳이 따로 편성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방송사에서 단일 교제살인 사건을 다룬 적은 있지만 교제살인 문제를 이처럼 심층적으로 다룬 방송은 처음이었다. 두 방송의 제작진에게 왜 교제살인에 주목했는지를 물었다.
"몇 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죽었다"
‘죽어서야 헤어졌다’는 보도본부 소속 이승준(47) 기자가 기획·취재했다. ‘교제살인 보고서’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본부의 김민회(38) PD의 작품. 각각 교제살인을 취재하던 두 사람은 취재·제작 중에 같은 주제로 방송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속도 직군도 다른 3040세대 남성 두 명이 교제살인을 택한 이유는 닮아있었다.
“기시감 때문이었어요.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작년에도 봤는데, 몇 달 전에도 있었는데’ 하는 느낌. 찾아보니 교제살인이 올해에만 13건이더라고요.”(이승준 기자)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요. ‘이렇게 죽는데 왜 오랫동안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어요.”(김민회 PD)
사회도, 피해자도 위험을 모른다
이들은 취재 중 여러번 놀랐다. 취재 시작점인 교제살인 공식 통계조차 없었다. “어떤 문제의 해법을 모색할 때 출발점은 통계를 보고 현황을 파악하는 거잖아요. 통계가 없다는 것은 사회가 여전히 이 문제를 사소한 문제, 개인 간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방증 아닐까요.”(이승준 기자)
김민회 PD는 취재를 시작하며 ‘안전이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여성들이 몇 년 전부터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었고, 200만~300만 원을 요구하는 ‘안전이별 대행업체’까지 등장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교제살인의 위험성을 모르고 산 건 그만이 아니었다. “여러 피해자들을 접촉했는데 자신이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연인의 통제 속에 있으면서도 ‘내가 잘못해서'야, '연인 간의 갈등이야'라고 생각하는 거죠.”(김민회 PD)
물리적 폭력은 없어도 연인의 옷차림, 귀가시간, 대인관계 등을 완전히 통제하려고 하는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는 가장 강력한 교제살인 징후다. 영국, 호주, 아일랜드는 강압적 통제를 범죄로 규정하고 최대 징역 7년에 처한다. 김 PD는 연인의 통제에 경각심을 가지도록 방송에서 강압적 통제의 유형을 상세히 전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 = 공적 영역"
방송이 나간 후 이 기자와 김 PD 마음에 계속 남아있는 건 유가족들이다. “사건 녹취록과 피해 사진을 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공론화를 위해 그 자료들을 계속 보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유족들의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해 아쉬웠어요.” (김민회 PD)
이 기자는 2020년 충남 당진에서 교제살인으로 두 딸을 한꺼번에 잃은 아버지 나종기씨의 표정과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고 할 만큼 삶의 심연에 빠졌던 분이 22대 국회에서 교제폭력 입법을 한다니까 한걸음에 오셨어요. 저 같으면 이미 피해자가 된 마당에 입법이야 되든 말든 신경을 끌 것 같은데 오히려 희생자들이 더 나오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는 부분들이 크게 다가왔어요.”
갈 길은 여전히 멀다. 경찰은 여전히 교제폭력을 사회가 나서야 할 구조적 문제로 보지 않고 ‘남친, 여친 사이의 다툼’이라고 기록한다. 이 기자는 말했다. “취재 중 만난 현직 판사가 한 말이에요. ‘사적 영역이기 때문에 공권력 개입이 자제돼야 한다는 말은 그 영역이 정상적일 때만 성립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교제폭력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전되지 않을 때 이 말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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