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20세기 중후반 서양 음악은 전통적 구조와 형식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경계를 넓혀 갔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컴퓨터 음악 실험이 주류를 이루며 '현대음악'으로 불린 그 시절의 움직임은, 안타깝게도 '동시대 음악은 난해하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시대를 앞선 음악 못지않게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이어 가며 동시대 청중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음악도 꾸준히 필요하다.
이전 시대 음악의 난해함에 단절을 선언한 시작점에 아르보 패르트가 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스타일과 12음기법 음악을 썼던 패르트는 어느 순간부터 그레고리안 성가,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형식을 추구했다. 복잡함은 걷어내고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의 반복과 울림을 중시하는 그만의 고유한 양식인 '틴티나불리'(종의 울림)를 만들었다. 독일 ECM 레이블을 통해 소개돼 온 그의 음악은 '그래비티' '어바웃 타임'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수록됐다.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음악도 많은 무대와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에 글래스는 중요한 테마곡을 썼는데, 점진적 선율의 변화와 화성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은 그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자리하게 됐다.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과 글래스의 ‘에튀드 5번’ 등 두 작곡가의 이름은 한강 작가가 밝힌 플레이리스트에도 등장한다.
글래스의 영향을 받은 막스 리히터,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음악은 스트리밍 음원 서비스 시대에 '최고의 선호도'를 기록해 왔다. 두 사람 역시 실험음악과 전자음악, 음렬주의의 대표 작곡가인 루치아노 베리오의 제자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의 음악은 장르를 규정하기 좋아하는 음반사로부터 '네오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발디의 '사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리컴포즈드'는 초연자인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호프도 내한 무대를 가졌고, 한국에서도 종종 공연된다. 인간의 수면 패턴을 연구해 음악으로 만든 8시간의 긴 곡 '슬립'은 관객이 편히 잠들도록 침대가 놓인 공연장에서 연주되기도 하는, 인기 작품이다. 내년에 아시아 투어를 계획하고 있는 에이나우디 음악의 스트리밍 횟수는 매년 90억 회에 이른다. 악기 사용도 단순화해 서정성을 극대화시킨 음악으로 사랑받는다.
백제시대 원곡과 공명, 오늘의 음악 '수제천 리사운즈'
단순한 음악만 대세일까. 최근 작곡가 최우정의 '환(還)'과 '수제천(壽齊天) 리사운즈(resounds)' 초연 무대를 봤다. '환'은 현악 앙상블 조이오브스트링스와 피리 연주자 진윤경이 함께한 짧은 피리 협주곡이다. 전통곡을 연주할 때와는 또 다른 피리의 음색과 주법, 조화에 깜짝 놀랐다. 전통을 주장하진 않지만 분명 피리 곡이었고,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현악 앙상블과의 어우러짐을 감탄하며 즐길 수 있었다. '수제천'은 '자연의 메아리'를 주제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작곡가에게 위촉한 작품이다. 조선시대 궁중음악인 '수제천'의 원곡인 '정읍'은 백제시대의 노래로 전해지는 1,500년 전 음악이다. 이날 프로그램은 두 악장으로 구성된 '수제천'의 1악장 연주 후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과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을 선보인 뒤 2악장을 연주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음악평론가 신예슬은 "아주 오래된 음악과 공명하는 오늘의 음악"이라고 평했다.
20세기 위대한 작곡가들을 길러낸 작곡가이자 지휘자, 교육자였던 나디아 불랑제는 필립 글래스와 존 엘리엇 가디너, 에런 코플런드, 다니엘 바렌보임, 아스토르 피아졸라, 얼마 전 타계한 팝 음악 거장 퀸시 존스의 스승이었다. 지금은 피아졸라의 탱고가 인기 클래식 레퍼토리가 됐지만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 항구 빈민의 문화인 탱고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불랑제는 탱고를 소재 삼아 서양 음악의 형태 안에 발전시켜 보기를 격려했고, 클래식 요소와 융합한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한국 음악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하되 세계인의 담론을 끌어낼 사조가 만들어질 날을 기대한다. 국립 단체의 지지가 필요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