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신라 중엽, 세 명의 왕이 '진(眞)’ 자 돌림의 이름을 가지고 나란히 나타난다. 진흥왕(540~576), 진지왕(576~579), 진평왕(579~632) 3대가 그들이다. 물론, 왕 자신은 이 이름을 모른다. 왕의 이름은 당사자가 죽은 다음에 정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생전 업적의 평가나, 후손의 소망이 들어간다. 6세기 중반~7세기 중반, 신라인은 이 세 왕에게 ‘진’ 자를 쓰며 어떤 엄정한 평가와 강한 소망을 담았을까.
이들이 다스린 100년 가까운 기간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진흥왕은 36년간 신라의 영역을 한반도 거의 절반까지 확장했다.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로 고구려와 백제에 눌려 지내던 신라 아니었던가.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는 기지개 켜듯 일어나는 신라를 한반도의 새로운 주역으로 각인시켰다. 그리고 진평왕은 50년 넘게 왕위에 있었다. 할아버지 진흥왕의 기초를 단단히 이어받아 세운 업적의 크기는 그의 재임이 끝난 후 불과 30여 년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으로 가늠된다. ‘흥’성(興盛)해서 ‘평’정(平定)한 ‘환상의 조손’(祖孫)이었다.
문제는 가운데 진지왕이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그는 20대 중반의 혈기방장한 나이에 즉위했으나 4년 만에 쫓겨난다. 삼국사기에는 그 까닭이 나와 있지 않은데, 삼국유사에는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알려준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 왕이 여염집 유부녀를 궁 안으로 불러 수청 들게 한 일에 대해 쓴다. 쫓겨날 만하지 않은가 확인하는 투다.
두 가지 짚어볼 대목이 있다. 먼저, 왕을 쫓아낸 주체인 ‘나라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월성 앞에 경주 사람이 모여 촛불시위를 벌였을 리 없고, 아마도 신라 고유의 화백회의 같은 곳에서 이뤄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오늘날의 탄핵이다. 쿠데타가 일어나 왕이 바뀌는 반정과는 다르다. 사실 우리 왕정 시대에 ‘반정’은 더러 있지만, 탄핵은 이것이 유일한 사례여서 흥미롭다.
둘째, 왜 탄핵을 결의했을까? 왕이 어지럽고 음탕했기 때문이라지만, 왠지 표면적인 이유처럼 보인다. 나라 사람들은 어떤 조바심에 시달렸던 듯하다. 진흥왕의 업적으로 추동력이 생겨 나라가 빛나는 궤도를 탈 무렵, 진지왕에게서 심각한 이탈 조짐이 보이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라 사람들은 일 잘하는 왕을 절실히 원했다. 그리고 진평왕이 거기에 부응해, 결과적으로 진 자 돌림은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오늘날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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