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노동 계급 연인 그린 연극 '로미오 앤 줄리'
비극적 운명 '로미오와 줄리엣' 현대적 변주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연극, 영화, 뮤지컬, 음악, 발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젊은 연인의 이야기는 여전히 작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연극 '킬롤로지'의 영국 극작가 게리 오웬은 16세기 이탈리아 베로나 명문 가문의 두 연인을 현대 영국 웨일스 노동 계급의 자녀로 데려왔다. 지난해 영국 런던 내셔널시어터(NT)에서 선보인 '로미오 앤 줄리'(연출 부새롬)가 지난 14일 예스24아트원 2관에서 막을 올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양한 장르로 옷을 갈아입어도 기본 플롯과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대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로맨틱한 발코니 장면이라든가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인가요"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대사는 여러 각색 작품에서도 살아남아 빛을 발했다. '로미오 앤 줄리'에는 낭만적 발코니도, 아름답고 시적인 대사도 찾아볼 수 없다. 웨일스의 낙후된 자치구 스플롯을 배경으로 알코올 중독자 엄마의 집에서 딸을 키우는 미혼부 로미와, 가난한 노동 계급 집안에서 천체물리학자를 꿈꾸는 우등생 줄리가 만나 이상과 현실, 꿈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낭만적 연애 비극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베로나의 명문 가문인 캐플릿가와 몬태규가의 오랜 반목 때문이다. 두 집안이 어떤 사연으로 원수지간이 되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결국 이로 인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집안의 다툼을 피해 신부님의 도움으로 야심차게 계획했던 사랑의 도피는 로미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으면서 실패하고 만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집안 간의 다툼과, 운명의 장난으로 비극적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랑 포기해야 이루는 천체물리학자의 꿈
'로미오 앤 줄리'에서 둘의 사랑을 막는 것은 기성세대의 방해도 운명도 아니다. 알코올 중독자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로미는 낯선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후 18세에 싱글 대디로 양육을 전담한다. 반면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부모의 헌신 속에 천체물리학자의 꿈을 키워 가는 동갑내기 줄리는 영국 최고 명문 사학 케임브리지대의 입학 허가를 받는다. 지금의 학점을 유지한다면 내년에는 케임브리지대로 떠날 예정이다.
너무나도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 놓인 로미와 줄리는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사랑에 빠진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둘은 피임에 실패하면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임신은 너무 다른 둘을 묶어 놓는 고리인 한편, 꿈을 향해 날아가려고 했던 줄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로미와 줄리에게는 실수를 되돌릴 '낙태'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케임브리지대를 포기하고 웨일스의 공립 카디프대에 다니면서 꿈과 사랑을 병행하는 길을 선택한다. 로미는 그것이 줄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고, 줄리는 모든 것을 알았지만 로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극은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하는 젊은 연인 앞에 현실이라는 장벽을 놓는다. 로미 엄마는 애초부터 양육을 도울 의지가 없었고 줄리 부모는 똑똑하지만 철없는 딸에게 현실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부모님의 보호를 벗어난 18세 어린 연인에게 양육과 임신은 힘겨운 장벽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아이가 있어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었지만 줄리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카디프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케임브리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로미는 마침내 케임브리지를 포기한다는 것이 줄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된다. 둘은 원작의 비극을 넘어 사랑을 이뤄낼 수 있을까.
사랑과 꿈이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달은 줄리는 꿈을 포기하고 서로를 찾아낸 것만으로 운이 좋았다고 위로한다. 모든 상황을 깨달은 로미는 줄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운명적으로 어긋나는 사랑을 낭만적으로 그렸다면, '로미오 앤 줄리'는 현실의 장벽 앞에 서로를 위해 이별을 선택하는 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의 고민에 한걸음 다가온 로미와 줄리의 이야기는 관객들의 강한 공감을 이끌어내며 눈물짓게 했다. 공연은 내년 3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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