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반도와 남중국해 등 주요국 전략자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해드립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이 격주 화요일 풍성한 무기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문명을 탄생시킨 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종교와 윤리, 도덕을 발전시키며 내적 수양을 강화해왔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이라는 비극은 그 어느 시대에서도 막지 못했다. 이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욕망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경쟁은 먹이와 번식 때문에 일어나고, 대부분의 동물들은 배가 부르거나 번식기가 끝나면 구태여 다른 개체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마치 욕망의 임계점이 없는 것처럼 더 많은 자원, 더 강한 권력을 쥐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 정확히는 전쟁의 역사는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 왔다.
중국 군사적 팽창에 군비 늘리는 대만·필리핀·호주
전쟁사를 연구하다 보면 그 어느 전쟁 때나 비슷한 사건과 상황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 간 이해관계 충돌 상황이 발생하고, 이러한 충돌로 인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이 과정에서 군비 증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군비 경쟁의 끝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세계는 군비 경쟁 체제에 들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1% 안팎의 국방비를 쓰던 유럽 각국은 3, 4년 만에 국방비를 적게는 GDP 대비 2~3%, 많게는 5%까지 올리고, 모든 유형의 무기 생산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유럽 각국의 이러한 군비 증강은 러시아가 수년 내 유럽을 침공할 수 있다는 각국 정부 고위 관료들과 정보기관의 경고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미국과의 패권 경쟁을 위해 천문학적인 군비 투자에 나서며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놀란 아시아 각국도 국방비를 대폭 늘리고 있다. 당장 일본이 GDP 대비 1%를 유지해오던 방위비 지출을 2%로 늘리고 있고, 대만과 필리핀, 호주 등 역내 국가들도 국방예산을 대폭 늘리며 해·공군 전력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특히 남중국해 각지에서 중국과 해상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고, 새 정권 출범 이후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구축 전략에서 선봉장을 자처하고 있는 필리핀은 그야말로 군사력을 ‘재창군’ 수준으로 강화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 겪는 필리핀...'재창군 수준' 군사력 강화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필리핀에는 이렇다 할 해·공군이 없었다. 해군은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무상 공여한 해안경비대용 경비함 3척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소형 경비정이 전부였고, 공군은 단 1대의 전투기도 없이 낡은 저속 공격기와 헬기 몇 대가 전부였다. 사실상 해·공군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던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중국에 너무도 만만한 상대였고, 주요 분쟁 수역에서 중국에 여러 차례 봉변을 당했던 필리핀은 언젠가 중국과 정말 크게 충돌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섰다.
지난 2022년 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필리핀군 현대화 사업 계획을 대폭 확장해 육·해·공군 모든 전력을 몇 단계 강화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섰다. 마르코스 정부는 한국에 필리핀 해군 최대 전투함인 미겔 말바르급 방공 호위함 2척과 2,200톤급 다목적 초계함 6척을 발주하고, 잠수함 도입 사업도 진행 중인데 한국산 잠수함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필리핀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공군력 확장이다. 지난 2015년부터 12대의 FA-50PH 경전투기를 도입해 운용 중인 필리핀은 이 전투기로는 현대적인 방공 전투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신형 다목적 전투기 도입 사업, MRF를 진행 중이다. 당초 이 사업은 약 1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4.5세대 전투기를 최대 12대 구매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지금은 70억 달러로 40대의 고성능 전투기를 구매하는 것으로 대폭 확대됐다. 현재 이 사업은 한국의 KF-21, 미국의 F-16V가 유력 후보로 경쟁 중이다.
고성능 전투기 구매와 기존 전투기 개량 사업 병행하는 필리핀
필리핀은 이와 별개로 FA-50 추가 도입과 기존 보유분 성능 개량 사업도 착수했다. 당초 계획에 없던 이 사업은 지난해 소요가 제기돼 최근 확정됐는데, 필리핀은 6억8,100만 달러를 들여 12대의 FA-50 블록 20을 도입하고 9,540만 달러의 비용으로 기보유분 FA-50PH 12대를 블록 20 사양으로 개량하기로 했다.
필리핀이 현재 운용 중인 FA-50PH는 본격적인 전투기로 부르기에는 다소 애매한 기종이다. 동급 전투기 중에서는 비교적 준수한 성능을 가진 이스라엘제 EL/M-2032 레이더를 갖추고는 있지만, 공대공 전투용 무장으로 근거리용 미사일인 구형 AIM-9M 사이드와인더 정도만 탑재할 수 있어 수십 킬로미터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현대 중거리 공중전투 수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최근 몇 년간 미국·일본·호주 등과 실시한 연합훈련에서 FA-50PH의 기본 성능과 잠재 능력을 충분히 확인했고, 레이더와 무장 일부만 개량하면 방공 전투용으로 우수한 성능을 낼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됐다는 현지 보도들이 많았다.
필리핀이 도입하는 FA-50 블록 20은 폴란드와 말레이시아 수출이 확정된 최신 개량형이다. 미국제 팬텀 스트라이크 AESA 레이더를 탑재하고, 이에 맞춰 전자장비와 무장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현대화시켰다. 한국산 KGGB 유도폭탄을 비롯해 미국산 JDAM, 페이브웨이 시리즈 등 정밀유도폭탄을 대부분 운용할 수 있고, 현재 개발 막바지 단계에 있는 장거리 공대지 순항 미사일 KEPD 350K-2 미사일도 탑재 가능하다.
필리핀이 FA-50 블록 20에 가장 기대하는 성능은 강력한 AESA 레이더와 신형 공대공 무장이다. FA-50 블록 20은 신형 레이더와 AIM-120 암람 공대공 미사일을 운용해 100㎞ 밖에서도 적기를 공격할 수 있고, 기존 구형 사이드와인더 대비 2배 이상 사거리를 가진 최신형 IRIS-T 공대공 미사일도 운용할 수 있다.
필리핀 공군, 창설 이후 처음으로 가시거리 밖 교전 능력 갖출 전망
FA-50 블록 20은 암람 미사일 4발, IRIS-T 2발, 보조연료탱크 1개 등을 장착하고 440㎞ 이상의 작전반경을 갖기 때문에 필리핀 영토 전역은 물론, 스프래틀리군도 등 주요 분쟁 수역에서 효과적인 방공 작전 수행이 가능하다. FA-50 블록 20 도입으로 필리핀은 공군 창설 이후 처음으로 가시거리 밖 공대공 교전 능력을 갖춘 전투기를 갖게 된 것이다.
필리핀이 당초 계획에 없던 FA-50 블록 20 도입과 기존 보유분 성능 개량 사업을 추진하고 나선 이유는 그 탁월한 ‘빠른 전력화’와 ‘가성비’ 덕분이었다. 필리핀이 현재 구매하려는 F-16V나 KF-21은 기체와 각종 지원 장비 등을 구매하면 대당 1억5,000만~1억7,000만 달러는 줘야 하고, 지금 주문하더라도 2030년 이후에나 초도 물량을 받을 수 있다. 당장 몇 년 안에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막대한 돈을 주고 전투기를 발주해도 2030년 이후에나 전투기를 받을 수 있다면, 당장의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대한 빨리 도입할 수 있는 전투기부터 들여와야 했다는 것이다.
FA-50은 가성비도 훌륭하다. 필리핀에 앞서 FA-50 블록 20을 구매한 폴란드와 말레이시아는 대당 약 700억 원 정도에 계약했다. 필리핀이 이번 사업에 책정한 FA-50 블록 20의 대당 가격은 약 831억 원으로 F-16V 대비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필리핀은 9,540만 달러(약 1,392억 원)를 들여 기존 FA-50PH 12대를 블록 20 사양으로 개량한다. 대당 약 116억 원의 예산으로 경공격기 수준의 성능이었던 FA-50을 가시거리 밖 공대공 교전과 공대지 정밀 타격이 가능한 최신 4.5세대 전투기급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60여 대의 FA-50을 운용 중인 우리 공군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 공군은 구형 전투기의 급격한 퇴역이 진행되고 있고, 주변 안보정세가 매우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비 부족으로 전투기 도입 사업들이 축소·지연되면서 전투기 전력이 최소 요구치 대비 40대나 부족한 심각한 전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예산 부족으로 신형 전투기 도입이 어렵다면, 기존 전투기들의 성능을 강화시켜 전력 공백을 최소화하는 임기응변이라도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북한마저 신형 전투기를 구매할 정도로 주변국 모두가 군비 증강 폭주를 벌이고 있는 지금, 필리핀 사례를 보며 우리 정부가 깨닫는 것이 있기를 바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