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노상원은 회원이 아니야. 강의 들으러 한 번 온 게 전부야."
12·3 불법계엄의 기획자로 꼽히는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이른바 '4·10 부정선거' 의혹을 공부하러 갔다고 밝힌 곳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줄여서 '대수장'이라고 부르는 예비역 단체입니다. 대수장 상임대표를 맡은 김근태 대표는 노 전 사령관이 회원은 아니라면서도 지난해 9월 대수장 회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부정선거 강의에 노 전 사령관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있다고 밝혔습니다. 회원도 아닌 그가 홀연히 대수장 사무실에 나타나 말없이 강의를 듣고 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노상원이나 이번 비상계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비역 단체가 왜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져서 강의까지 열게 된 것일까요? 이날 강연자로 나선 이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산 조작이 있었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을 경찰에 고발한 육사 출신 장재언씨입니다.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이미 지난 8월 무혐의로 판단한 후 사건을 불송치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부정선거 음모론을 설파하는 중입니다.
尹 정부 수호장성단 자처한 대수장
우선 대수장이 어떤 단체인지 살펴볼까요. 대수장은 2019년 문재인 정부에서 맺은 9·19 남북 군사합의에 반발하며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당시 예비역 장성 단체인 '성우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출범했습니다. 이들은 9·19 합의 폐기 및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국민성금 모금 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때 약 400명의 예비역 장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국방부 장관을 지낸 신원식 국가안보실장도 포함됐습니다. 게다가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하나회' 출신 인사들도 포진돼 있었습니다.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린 이필섭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 김재창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이 해당됩니다.
출범 당시부터 강한 보수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수장은 윤 정부 출범 이후 정치 한복판으로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9·19 군사합의나 안보 이슈에서만 목소리를 높인 것이 아닙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야당과 반정부 세력들이 괴담을 퍼트려 윤 정부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제22대 총선 직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선거개혁 촉구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의 참패가 예상됐지만 일부 극우 유튜버들은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진다면 부정선거 때문"이라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이런 부정선거 음모론에 예비역 단체였던 대수장 당시 대표와 회원들이 심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수장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장군의 소리'에서도 2020년부터 '부정선거 시리즈' 영상을 올리며 부정선거 음모론을 퍼트렸습니다.
대수장 활동 인사들 국방 분야 곳곳에 포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예비역 장성들이 특정 후보 캠프에 합류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각종 포럼, 싱크탱크를 만들고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거나 안보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합니다. 선거 후에 국방부나 산하 기관의 주요 보직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대수장 측 인사들은 2022년 대선 전부터 윤석열 캠프 등에서 활동을 하며 현 정부와 보조를 맞췄습니다. 육군 대장 출신이자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당선되기도 했던 김근태 대표는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국방정책특보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만들었던 '국방포럼'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국방부 산하기관인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김정수 원장도 국방포럼 사무총장을 맡은 인물이고 대수장 유튜브 '장군의 소리'에 출연한 경력도 있습니다. 다만 KIDA 측은 "김 전 원장은 대수장에 가입한 적 없으며 '장군의 소리' 출연도 딱 한 번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대수장 회원 출신인 신원식 실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대수장의 기세는 더욱 커졌습니다. 2024년 4월에 있었던 정기총회에서는 윤봉희 국방부 정책기획관이 직접 참석해 신 장관의 축사를 대독했습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장군의 소리'에 출연했고 대수장 관련 행사에도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군 출신 정부 관계자는 "현 정부에서, 특히 국방 분야에서 대수장의 입김이 매우 강하다"며 "이들 역시 정부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성명을 내고 집회에 참가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이번 정부에서 한자리를 꿰차려고 하거나 연구 용역 등을 받아내려는 생각을 지닌 예비역들이 주로 강한 목소리를 내며 정부의 실정을 옹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수장은 계엄 사태 이후에도 윤 대통령을 옹호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난해 6일 국회 소통관에서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탄핵되면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탄핵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도균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대수장과 연관된 '육군사관학교 구국동지회'에서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을 응원하는 화환을 보내고 있고 영치금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대수장 회원들은 각종 보수집회에 참가해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 대표는 한국일보에 "내가 대수장 대표를 맡은 이후로는 부정선거와 관련한 활동을 하지 않았고 안보 정책과 관련해서만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수장이 부정선거 의혹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통령 탄핵을 반대했던 것도 군 통수권자가 탄핵됐을 경우 안보공백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노 전 사령관이 대수장에서 진행한 '부정선거' 강의를 들으러 왔듯이 대수장이 음모론을 설파하는 플랫폼이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9월 취임 직후 노 전 사령관에게 부정선거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면 수집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김 전 장관의 지시를 받고 노 전 사령관은 대수장을 찾아 강의를 들은 것입니다. 김 전 장관과 노 전 사령관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계엄을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정선거 의혹에는 선을 긋고 있지만 '장군의 소리' 유튜브에는 여전히 부정선거 시리즈가 게시돼 있습니다. 계엄을 옹호하고 탄핵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계속해서 내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 김 전 장관, 그리고 군 관계자들에게 계엄의 단초가 됐던 '부정선거' 의혹을 주입시킨 것은 누구일까요.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예비역 장성들은 어쩌다 윤 정부를 수호하는 장성단으로 전락한 것일까요. 정권교체로 어렵게 얻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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