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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머스크 탄생시킨 고숙련 외국인 비자, 트럼프 2기서 살아남을까

입력
2025.01.27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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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미국 내 H-1B 비자 논쟁
트럼프 진영 내부서 '확대 vs 축소' 설전
H-1B 소지자 많은 기술업계, 향배 촉각

편집자주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거주민 중 흑인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화려한 이름에 가려진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얼굴을 '찐밸리 이야기'에서 만나 보세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지난 2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에서 환호하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지난 2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에서 환호하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을 앞둔 지난달 말, 모처럼 트럼프 진영 내부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고숙련 외국인에게 미국이 발급하는 'H-1B 비자'를 두고서였다.

발단은 강경 보수 성향 인플루언서 로라 루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글. 루머는 백악관 인공지능(AI) 수석 정책 고문에 내정된 인도계 기술 전문가 스리람 크리슈난에 대해 "크리슈난은 미국 학생들에게 주어져야 할 일자리를 외국 학생들이 빼앗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그의 임명은)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기술직 이민자들에 대한 영주권 상한선을 없애자"고 했던 크리슈난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 트럼프 1기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지낸 스티브 배넌도 H-1B 비자 확대를 지지하는 실리콘밸리 인사들을 '올리가르히(oligarch·신흥 재벌)'라고 일컬으며 "H-1B는 미국 시민의 일자리를 빼앗아 외국에서 온 계약직에 주고, 돈을 덜 지불하려는 사기"라고 거들었다. H-1B 비자 발급을 줄여 외국인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양질의 일자리가 더 많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인 머스크는 1992년 펜실베이니아대에 편입하며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후 H-1B 비자를 받아 창업 활동을 하다 2002년 시민권을 받았다. H-1B 비자의 수혜를 본 당사자다. 그는 "내가 스페이스X와 테슬라, 미국을 강하게 만든 수백 개의 다른 회사들을 구축한 수많은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 미국에 있는 이유는 H-1B 때문"이라며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전쟁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집안싸움이 격화할 조짐을 보이자 결국 트럼프가 나섰다. 그는 "H-1B 비자는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나는 이 비자의 신봉자였다"며 머스크 편을 들었다. 지난해 대선 전에도 트럼프는 미국 대학 졸업자에게 영주권을 자동으로 제공하는 정책을 제안하며 고숙련 이민자를 유치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트럼프의 이 한마디로 H-1B 비자 축소 논쟁은 일단 정리된 분위기다. 하지만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다. 지금은 H-1B 비자에 긍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과거 H-1B 발급을 사실상 축소시켜 산업 현장에 혼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이 바로 트럼프인 탓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미국산 구매, 미국인 고용(Buy American, Hire American)'이라는 슬로건 아래 비자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늘리는 등 관련 절차를 강화해 이민자 유입을 통제했다. 그 결과 트럼프 첫 임기 4년간 H-1B 비자의 평균 거부율은 17%를 초과했다. 후임자이자 전임자인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시절의 3.2%와 비교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트럼프는 지난 20일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이제 관심사는 H-1B 비자에 대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정책을 채택하고 시행하느냐의 문제다. 특히 실리콘밸리의 관심이 크다. 미국에서 H-1B 비자 의존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한 곳이 실리콘밸리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H-1B 비자 소지자의 출신 국가 / 미국 지역별 H-1B 비자 신규 발급 건수 및 신규 소지자 중간 연봉. 그래픽=박구원 기자

실리콘밸리 H-1B 비자 소지자의 출신 국가 / 미국 지역별 H-1B 비자 신규 발급 건수 및 신규 소지자 중간 연봉. 그래픽=박구원 기자


H-1B 신청 외국인, 매년 발급 제한 초과

H-1B 비자는 취업을 목적으로 미국에 체류하려는 외국인에게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비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자다. 미국 이민서비스국은 H-1B 비자를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의 적용'을 요구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발급되는 비자라고 정의한다. 이 비자 신청을 위해선 최소 학사 학위 이상의 학력이 필요하고, 미국 기업으로부터 유효한 임시 고용 제안을 받아야 한다. 고용주는 해당 직종에 대해 지역 평균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해선 안 된다. 고용주가 저임금직을 H-1B 비자 소지자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H-1B 비자 신청 요건을 갖췄더라도 받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미국 정부가 매년 신규 H-1B 비자를 8만5,000건으로 제한하고 있는 탓이다. 매년 신청자 수가 발급 한도를 초과해 대상자는 추첨 방식으로 선정된다. '당첨' 확률은 평균 30%이다. 지난해 확률은 11%밖에 되지 않았다. 신청자 10명 중 단 1명만 발급에 성공했을 정도로, 받고자 하는 외국인이 많다는 의미다.

일단 발급받으면 원칙적으로 3년 동안 유효하며, 한 차례 연장을 통해 최대 6년까지 미국에 체류할 수 있다. 영주권 신청이 접수된 경우에는 추가 연장이 가능하다. 현재 미국 내 기업 약 5만 곳에서 60만 명의 H-1B 소지자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H-1B 비자 소지자의 약 70%가 인도 출신이고, 중국이 그 다음이다. 캐나다, 대만, 한국, 필리핀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얼굴 모양의 조각상과 미국 국기. 로이터 연합뉴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얼굴 모양의 조각상과 미국 국기. 로이터 연합뉴스


"H-1B 소지자들, 기업 생산성 높여"

실리콘밸리는 H-1B 비자 프로그램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2021~2024년 실리콘밸리는 뉴욕 다음으로 가장 많은 H-1B 비자가 승인된 지역이었다. 실리콘밸리 H-1B 비자 소지자의 약 70%가 구글, 메타, 테슬라 같은 주요 기술 기업에 직접 고용돼 있다. 이렇다 보니 실리콘밸리 내 H-1B 소지 노동자들의 중간 연봉은 12만9,000달러(약 1억8,530만 원)로 전국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실리콘밸리가 '기술 혁신 선도 지역'으로 거듭난 것은 H-1B 비자 프로그램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평가가 많다. 2020년 미국 국립경제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H-1B 비자 소지자를 고용한 기업은 미국 내 특허 출원이 평균 6% 증가했다. 이민자와 협력하는 팀의 생산성이 그렇지 않은 팀보다 10%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H-1B 비자가 단순 인력 충원뿐 아니라 기업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신도 한때 H-1B 소지자였던 머스크가 H-1B 비자를 강력히 지지하는 이유다. 그가 이끄는 여러 회사 가운데 테슬라에서만 지난해 724명이 H-1B 비자를 발급받았다.

전문가들은 H-1B 비자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고숙련 노동자들이 실리콘밸리로 모여들 수 있었다고 본다. 발급 축소 시 적잖은 실리콘밸리 기업이 외국인 취업을 그나마 제한하지 않는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연구개발 시설 등을 둘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리콘밸리의 경쟁력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20일 미 워싱턴 캐피털원아레나에서 자신이 서명한 행정명령 문서를 지지자들 쪽으로 들어 보이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20일 미 워싱턴 캐피털원아레나에서 자신이 서명한 행정명령 문서를 지지자들 쪽으로 들어 보이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트럼프·실리콘밸리 밀착, H-1B에도 영향?

이 때문에 실리콘밸리 안팎에서는 H-1B 비자와 관련한 트럼프 2기 행정부 방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과거 이 비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트럼프의 생각이 전향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축소보다는 유지 혹은 확대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적지 않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1기 때와는 달리 실리콘밸리와 밀착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 신호로 읽힌다. 머스크를 비롯한 기술업계 인사들의 입김이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유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기대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조짐도 엿보인다. 트럼프가 취임 첫날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 이 행정명령은 부모 중 최소 한 쪽이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으면, 미국에서 태어나더라도 무조건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게 골자다. 언뜻 H-1B 비자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고숙련 외국인들이 H-1B 비자를 받아 미국에 살려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자녀의 미국 시민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H-1B 비자 소지자들에 대한 불이익 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행정명령 내용대로라면 H-1B 비자 소지자의 자녀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21세가 돼야만 영주권 신청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시애틀 연방법원은 23일 해당 행정명령과 관련해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연방헌법 제14조에 배치된다고 결정했다. 이로써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의 시행에는 일시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이민을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게 트럼프 2기 행정부 기조라, H-1B 발급 또는 소지를 제한하는 별도 조치는 언제든 또 나올 가능성이 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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