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
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

작가 반-바지의 책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의 한 장면. 김영사 제공
‘쇼트-쇼트’는 일본 공상과학(SF) 소설의 전설적 작가 호시 신이치가 개척한 장르로, 일반적인 단편보다 훨씬 짧은 초단편 소설을 뜻한다. 단 두 페이지짜리 소설이 있을 정도다. 상식을 뒤흔드는 놀라운 상상력과 경쾌하고 풍자적인 스토리가 매력적이다. 오랜만에 그의 단편집을 꺼내 읽었는데, 1970년대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낡은 느낌이 없었다. 당시에는 단순한 사고실험이었을 SF적 상상력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소설 속 점원 없는 자동판매기 백화점의 모습은 오늘날 키오스크 매장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때로는 예언이 되는 것. SF 장르의 매력이다.
호시 신이치를 떠올린 건 반-바지 작가의 SF 단편 만화집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 때문이다. 분량만 보면 이 작품은 ‘쇼트-쇼트-쇼트’라 부를 만하다. 268페이지짜리 단행본 한 권에 80편이 넘는 작품이 실려 있다. 한 페이지짜리가 많고, 가장 긴 이야기도 20쪽을 넘지 않는다. 짧고 비연속적이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기 좋지만, 난해한 용어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고 주제 의식도 절대 가볍지 않다.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반-바지 지음·김영사 발행·268쪽·2만원
만약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시스템 종료’ 여부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만약 외계 문명과의 초광속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 지구의 드라마를 외계인이 볼 수 있다면. 만약 인공지능이 탑재된 기계가 자아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처럼 수많은 ‘만약’의 세계가 종횡무진 펼쳐진다.
표제작인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은 위상수학 용어로, '구성하는 모든 점이 외로운 공간'을 의미한다. '두 점이 아무리 가까워 보여도 (중략) 서로 떨어져 있는 공간.' 반-바지 작가는 이 수학적 개념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한다. 작품 속 다양한 생명체들은 각자 고유하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반목하면서도 연결을 시도한다.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태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는데도' 그들은 왜 연결을 시도하는 걸까. 우리 모두가 우주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일원'이기 때문일까. 이 책의 모든 모험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을 그래도 최대한 이해해 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다채롭고 흥미로운 내용, 매력적인 작화에 더해 만화 형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방식에서 또 한 번 놀랐다. 왼쪽에서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읽게 되어 있는 만화의 기본 원칙을 깨고 다양한 방식으로 읽게 만든 시도들이 눈에 띈다. 단순히 칸의 순서만 바꾼 게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서사가 펼쳐지는 식이다. 어쩜 이렇게 모든 면에서 새롭고 과감할 수 있을까. 22세기에 이 책을 볼 독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2020년대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전혀 낡지 않았고, 지금 시대를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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