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며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문화재청이 2023년 7월 일본에서 환수해 그해 9월 6일 공개한 13세기 고려시대 나전칠기인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의 국화넝쿨무늬. 문화재청 제공
우리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적 명품을 꼽으라면, 고려청자·고려불화·나전칠기가 아닐까 싶다. 이들 삼대장은 송나라 사신을 따라온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일부 언급되어 있는 명품으로, 고려의 문화력과 수출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불화야 당연히 불교와 관련된 유물이고, 나전칠기도 최고급은 불경을 담던 경함(經函) 등에서 사용됐다. 청자 역시 최고급은 왕실과 사원이 주된 소비처였다.
불교 하면 으레 소박과 검소가 떠오르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모든 종교 문화에는 화려함이 존재한다. 이를 ‘장엄(莊嚴)’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성당이나 이슬람의 모스크 등에서도 확인되는 종교의 한 특징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박을 추구한 것은 성리학이다. 화려한 청자를 벗고, 순백의 백자를 추구했다. 또 모든 예술적 가치는 인간 본질을 현혹하는 헛짓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환쟁이로 폄하됐고, 노래와 춤을 추는 예술가들은 딴따라로 전락한다. 물론 조선에서도 권문세가와 양반들은 화려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소수의 개인적인 추구는 사찰이 공공재의 기능을 가지고 대중과 함께한 것과 달랐다. 즉 개인의 치부는 문화를 견인할 정도의 역량이 안 되었던 것이다.
성리학이 추구한 구조는 사농공상의 중농주의다. 불교로 대표되는 고려가 상업의 나라였다면, 조선은 농업 국가였다. 이로 인해 농업생산자가 아닌 제조업자(공인)와 상인은 하류에 속했으며, 예술가는 더 낮은 등외의 천인에 불과했다. 이런 사회구조는 예술과 문화의 몰락을 초래한다.

고려불화 16나한도.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존하는 한국 문화재의 60∼70%는 불교문화재다. 이는 성리학이 추구한 이념과 이로 인한 문화 단절을 잘 알게 해준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유교가 붕괴한 지 불과 100여 년 만에 대두한 한류의 저력은 실로 괄목할 만하다. 우리 문화산업은 음악·드라마·영화 등에서 다양하게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또 이들에 대한 대우와 인식도 변화한 지 오래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불과 100여 년 만에 민족 성향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을까? 아니다. 삼국지 '동이전-고구려'에는 우리가 ‘밤낮으로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예술적 기질이 성리학의 조선에서 불교의 예술 필연성을 타고 오늘에 전해진다. 억눌리긴 했지만, 조선에서도 우리 민족의 문화적 힘은 면면히 계승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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