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의 동행] 주은정 여자야구 대표팀 인터뷰
작년 아시안컵 동메달 성과, 절박함서 비롯
엘리트 교육 없지만, 여자 선수들 크게 늘어
야구 보는 즐거움보다 직접 하는 즐거움 커
후배 ‘야구소녀’들 위해 노력하는 선배들
내년 첫 중·고교에 여자야구팀 신설 성과
마지막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은 순간, 투수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글러브에 얼굴을 파묻고 포수는 큰절을 하듯 땅에 몸을 숙인다. 간절한 승리를 지켰다는 안도와 기쁨.
작년 5월 28일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연맹(BFA) 여자야구 아시안컵에서 필리핀을 9대 5로 꺾고 슈퍼라운드(4강) 진출을 확정 지은 한국대표팀 영상은 유튜브에서 1분짜리 하이라이트로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에 이어 조 2위로 올라 홍콩을 14-4로 완파하고 동메달을 땄다.
올해 1,000만 관중을 달성한 프로야구는 티켓 구매자의 55%가량이 여성이었다. 여성팬 급증으로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의 입지를 공고히 했지만, 흔한 야구팬이라도 지난해 여자야구 대표팀의 동메달 소식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도 대표팀은 내년 아시안컵에서 메달 색을 바꾸겠다는 목표로 주말마다 모여 훈련한다. 대표팀 주장 주은정(29) 선수를 만나 여자야구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말 주 5일 근무, 주 2일 훈련
‘신체·의지·정신의 고취’와 ‘노력의 즐거움.’ 올림픽헌장에 담긴 문구다. 스포츠의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주 5일 일하고 이틀의 휴일을 온통 훈련으로 보내는, 그런데 그게 돈이 되지 않는 선수들에게 왜 운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이 될 것이다.
주 선수는 서울시체육회 야구소프트볼협회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중학생부터 30대 후반 자영업자까지 전국에 흩어져서 평일을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보낸 선수들이 토·일요일 훈련을 위해 모인다. “보통 오전 9시~9시 30분 훈련을 시작하고요. 토요일은 오후 4, 5시 정도에, 일요일은 3시 정도에 마무리해요.”
그런데 경기 화성에 있는 대표팀 훈련 구장은 실내 훈련장이 없다. “겨울에 실내 연습장을 쓸 수 있는 구장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실내 연습장과 야외 구장이 같이 있는 학교는 학생 선수들이 훈련해야 돼서 저희가 쓰긴 어렵고요.”
매주 겨우 훈련장을 섭외하는 실정이다. 지난달 30일엔 경기 성남 대원중학교에서 실내 훈련을 했고, 이번 주말은 경기 고양시에 있는 프로야구 키움 히어로즈 2군 구장이자 국가대표(남자야구) 훈련장에서 훈련한다. “시즌 중에는 거의 고정적으로 화성에서 훈련하는데 비시즌 기간에는 실내가 있는 곳을 찾다보니 계속 바뀐다”고 말했다.
따뜻한 곳을 찾아 전지훈련을 떠나는 프로 선수들의 환경은 언감생심. 추위와 싸우며 연말까지 훈련은 계속된다. “12월까지는 주말 훈련이 계속 있고요. 내년은 1월 한 달 정도는 쉬고 2월에 소집이 들어갈 것 같은데, 아직 정확한 일정은 안 나왔어요.”
주중엔 틈틈이 개인 훈련도 한다. “다들 레슨장 다니고 몸 관리해서 오는 그런 선수들이 아주 많아요. 저는 야구 레슨장을 다니지는 않고 신정고(서울 강서구) 소프트볼 팀에 가서 연습을 좀 많이 해요. 퇴근하고 가거나, 반차 쓰고 가거나 하죠. (퇴근 후) 운동하고 뭐 하고 하면 밤 10시쯤에 집에 들어가고요.”
절박함이 만들어낸 아시안컵 메달
그는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작년 아시안컵 필리핀전과 일본전을 꼽았다.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필리핀전을 잡아야만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경기였어요. 필리핀전에 사실상 저희 선수들이 올인을 해서 그다음 메달 결정전에 갈 수 있었고, 그게 아니었으면 메달 따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남자야구처럼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진 않지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은 다르지 않다. “절박함으로 작년에 아시안컵에서 메달을 획득했던 것 같아요.”
일본전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반성으로서다. 일본의 여자야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남자야구처럼 사실상 엘리트 코스로 선수들을 육성한다. “일본전을 하기 전 선수들이랑 얘기했던 게, ‘이기든 지든 우리 것을 보여주고 콜드 경기가 나더라도 할 거는 하자’였는데 제가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저도 많이 보여주지 못했어요. 너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였어요. (이전 대결에서보다) 점수 차를 많이 줄였다고 해서 좋아들 했는데, 저한테는 한편으로는 가장 화가 나는 경기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동료들 실력 자랑을 하자면
주 선수는 선수들 자랑을 해달라는 요청에 뿌듯하게 답했다. “개인적으로 박주아 선수랑 신누리 선수의 타격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신누리 선수는 저랑 같은 외야수고요. 박주아 선수는 유격수예요.” 수비가 힘든 유격수 자리에서 타격도 좋은 선수는 가치가 높다.
투수로는 누가 에이스일까. 그는 3명이나 꼽았다. “지금은 김보미 선수랑 박민성 선수고요. 김진선 선수도 기량이 많이 올라왔어요.”
특성은 모두 다르다. “김보미 선수는 경험이 많기 때문에 노련미가 있고 공이 그렇게 빠르지 않지만 정확성이 있어요. 제구가 굉장히 좋아요. 그리고 박민성 선수는 공의 무브먼트가 좋아요. 직구(속구)인데도 변화구처럼 오고, 아주 좋은 공을 가지고 있어요. 김진선 선수는 공의 무게감이 있어요. 속구에 강점이 있고 힘이 있는 편이라 공이 묵직하게 들어와요.”
칭찬할 선수가 더 생각났다. “제가 아까 최송희 선수(투수)를 언급 안 했는데, 사이드 공들이 좋아요. 우타자 몸 쪽, 좌타자 몸 쪽으로 던지는 공이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코너가 굉장히 좋죠.” 타자들이 치기 힘든 스트라이크존 가장자리를 잘 공략하는 투수라는 뜻이다.
막내인 중학교 3학년 곽소희 선수(투수)에 대해선 “신장이 176㎝로 대표팀 중 최장신이고, 타점(공을 놓는 지점)이 높다”고 평가했다. 타점이 높으면 공이 위에서 내리꽂히는 느낌이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서 치기 쉽지 않다.
대리만족이 아닌 내가 뛰는 기쁨
주 선수는 “저는 타격보다 수비를 더 즐거워하는 편”이라고 했다. 정수빈 선수(두산 베어스)와 박해민 선수(LG 트윈스)를 좋아한다. 두 명 모두 주 선수와 같은 중견수다. 중견수는 외야수 중 가장 넓은 수비 범위를 커버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때 육상선수로 당시 100m 13초 초반대를 기록했다는 그에게 제격이다.
“누가 봐도 안타라고 생각했던 타구들이나 정말 열심히 쫓아가서 생각지도 못했던 타구들을 잡아냈을 때, 너무 보람 있고 재밌어요. 대표팀 소집이 없을 때 프로야구 경기도 종종 보러 가는데, 경기를 온전히 즐긴다기보다는 보고 배우고 싶어서 가죠. 타자들이 쳤을 때 수비수들의 움직임, 투수가 공을 던졌을 때 수비수들 움직임, 그리고 콜 플레이(뜬공을 누가 잡을지 수비수끼리 주고받는 신호), 타구를 판단하면서 어떻게 가는지….”
순식간에 날아오는 공의 낙구 위치를 판단하는 건 보통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다. “연습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도 사실상 소리로 판단하는 편이라서,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에) 대략적으로는 판단이 되죠. 감각으로요.”
경기를 보는 것과 직접 뛰는 것의 차이가 크다고도 했다. “보는 건 대리만족인 게 많은 것 같아요. 직접 하면서 프로선수들 플레이를 따라가려고 하는 게 재미있어요. ‘내가 이만큼 해야지’라는 거죠.”
남자야구, 여자야구, 소프트볼
여자야구는 알루미늄 배트를 쓴다.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쓰는 나무배트보다 더 가볍고 공이 멀리 나간다. 사진촬영을 위해 주 선수가 들고 있던 알루미늄 배트를 받아보니, 그래도 꽤 무겁게 느껴졌다. “이걸 들고 어떻게 서 있죠?”라고 묻자, “저는 괜찮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천생 운동선수답다.
“원래 체육을 좋아했어요. 어릴 때 육상을 하다가 중학교에 갔는데 소프트볼 팀이 있길래 시작했어요.” 소프트볼 실업팀에서 직업선수로 활동했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그러다 실업팀을 그만둔 뒤, 몇 년 전 여자 사회인야구팀을 찾아 들어갔다. 그는 현재 시흥플레이볼 여자야구단 소속이다.
그는 한국 여자야구의 약점으로 파워를 꼽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 여자야구는 홈런이 잘 안 나와요. 저는 그라운드 홈런만 봤지 한 번도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본 적은 없어요. 우리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가서 보면, 체구들이 작은 편이에요.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엘리트교육이 없다 보니, 체격이 좋은 선수들이 많지 않고 파워를 기르는 훈련도 부족해서다.
여자야구와 소프트볼을 비교해도, 지원 차이는 크다. “소프트볼은 대한체육회에서 관리해 주기 때문에 조금 더 엘리트적이고, 대표팀이 꾸려지면 훈련 기간 동안 진천선수촌에 들어가서 전용 구장에서 훈련을 해요. 체계적으로 훈련 스케줄을 밟는 거죠.”
하지만 여자야구 대표팀은 대한체육회 소속이 아니다.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서 운영된다.
야구로 돈 못 벌지만, 늘어나는 여자 선수들
여자야구는 실업팀이 없기 때문에 선수로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대표팀은 훈련비를 지급받지만 교통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국적으로 사회인 여자야구팀(동호회 팀)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주 선수는 “한 2~3년 사이에 확 늘었다고 들었다”며 “전국에 지금 100개 이상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즘 야구가 인기가 많기도 하고, ‘최강야구’ 프로그램 영향도 있고요. 굉장히 많은 팀이 계속 생겨나고 있고, 없어지는 것 같다가도 또 생기고 하더라고요.”
요즘 리틀야구단은 남녀 선수를 가리지 않지만, 중·고교에 여자야구부가 없다 보니 리틀야구 후에는 바로 사회인야구팀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대표팀도 사회인야구팀 선수들로 구성된다.
“트라이아웃을 해요. 선수들이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전에 신청하는 거죠. 본인 이력을 쓰고 본인의 결과를 보여주는 건데 그 안에서 24명을 뽑는 거예요. 그렇게 상비군을 만들고 상비군 내에서도 20명을 잘라서 대표팀으로 선발하죠.” 선발전은 매년 있고, 작년 아시안컵 대표팀 구성과 비교하면 지금 절반 이상이 바뀌었다.
주 선수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저는 내년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은퇴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후배들한테 물려주고 싶어요. 더 좋은 선수들이 빨리빨리 나올 수 있게요. 비켜주면 아무래도 성장을 할 수 있는 게 생기니까요.”
프로야구의 여자야구 지원 늘어나지만
지난 9월 21일 여자야구 대표팀은 KIA 타이거즈 초청으로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를 방문했다. KIA가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직후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공인구 240구를 기증받고 양현종 나성범 정해영 김도영 등 KIA 선수들도 만났다.
KIA 심재학 단장은 평소 ‘여자야구 대표팀의 발전이 한국 야구의 궁극적인 발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심 단장은 “지원한 물품을 잘 쓰고 있다고 해서, 꾸준히 후원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키움은 이화여대 여자야구단의 훈련을 지원하고, 롯데는 프로야구단 주최 첫 여자야구 대회를 열었으며, NC도 10년 넘게 지역 여자야구단을 지원한다. 여자대표팀 감독과 코치도 프로야구 선수 출신들이 주로 맡아 왔는데, 현재도 롯데·SK 포수 출신 허일상 감독이 지휘한다.
그러나 아직 각 구단의 선의에 기대는지라, 프로야구의 체계적인 여자야구 지원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볼 순 없다.
내년 첫 중·고교 여자야구단 생긴다
많은 사랑을 받는 남자야구 국가대표팀은 ‘국민을 위해’ 혹은 ‘야구팬을 위해’ 경기하지만, 여자대표팀은 야구 소녀들의 길을 닦아주기 위해 경기를 한다. 내년 창원 마산무학여중·고가 전국 최초로 여자야구부를 창단하는 소식은 여자야구계의 기쁜 소식이다.
주 선수는 말했다. “저희가 성적을 내지 못했으면 중·고교 여자 야구팀이 만들어지는, 이런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표팀 선수들도, 동호회팀 선수들도 팀을 지키려고 10·15·20년을 한결같이 팀에서 운동하시는 분이 많아요. 지금 하고 있는 선수들이 더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나 야구하면 진로는 어떡하지’ 이런 걱정 하지 말고 우선은 즐기면서 편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밑에서 올라올 선수들이 있어야 실업팀이 만들어지니까, 여자야구를 발전시키려면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여자야구를 낯설어하는 사회에 전한 말. “여자야구와 소프트볼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여자 선수들도 이런 걸 하는구나, 하는 편견을 가지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봐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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