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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름을 법에 붙이려면…

입력
2025.02.19 16: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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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름 딴 ‘네이밍법’ 효과 크지만
입법 선정주의로 흐르면 부작용 논란도
‘하늘이법’도 파급효과 세심하게 고려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김하늘양 피살사건 이후 긴급 휴교령을 내렸던 대전의 초등학교가 17일 이레 만에 등교를 재개했다. 연합뉴스

김하늘양 피살사건 이후 긴급 휴교령을 내렸던 대전의 초등학교가 17일 이레 만에 등교를 재개했다. 연합뉴스


‘모든 안전규정은 피로 쓰인 역사’란 말이 있다. 실수, 탐욕, 부실한 감독, 때론 사람의 능력으로 예견하지 못한 변수 때문에 참사는 일어난다. 부랴부랴 대책이 마련되지만 ‘외양간 고치기’를 피하지 못한다. 비극은 반복되고, 외양간은 또 고쳐지고, 우리는 다시 만시지탄 가슴을 친다.

하지만 늦게라도 외양간을 수리한 덕에 살아남은 자들이 혜택을 누린다. 성수대교 붕괴 후 정밀검사를 거쳐 당산철교 부실을 잡아냈고, 대구 지하철 화재 후 지하철 좌석을 난연재로 만들었으며, 세월호 참사 후 연안여객선 블랙박스를 의무화했다. 안전규정과는 맥락이 다르지만, 민항기에 GPS가 도입된 계기는 1983년 대한항공 007기 피격이었다.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어떤 의미에선 참사로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목숨을 딛고 선 결과물이다.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을 ‘희생자’로 부르는 건, 그래서 과하지 않다.

피로 쓰인 안전 리스트엔 안타깝게도 어린이 이름들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다. 통학버스 안전규정을 담은 세림이법(2014년), 살인죄 공소시효를 배제한 태완이법(2015년), 스쿨존 교통사고를 가중처벌하는 민식이법(2020년), 아동학대 처벌을 강화한 정인이법(2021년). 어린이 이름 붙은 법을 이제 그만 보고 싶지만, 뒤늦게 사각지대가 발견되면 눈물을 머금고 목록을 추가해야 할 책임도 우리에겐 있다.

자식을 먼저 보낸 극한의 고통에 공감하기에, 아이들이 살았더라면 누렸을 포근한 엄마 품을 떠올릴 수 있기에, 어린이 희생자 이름을 딴 법안의 힘은 강력하다. 논리가 수십 년 해내지 못한 ‘살인죄 공소시효 폐기’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얼굴에 황산 테러를 당한 여섯 살 태완이의 비극이었다. 양천구 입양아 학대 살인 사건을 모르는 사람도 그 피해자 정인이는 안다.

다만 피해자를 앞세운 ‘네이밍 법안’의 강력한 파급력을 감안한다면, 검토 단계에서 신중한 고려를 거듭해야 한다. 처벌 강화 분위기에 휩쓸려 졸속으로 만들면, 엉뚱한 부작용이 속출하거나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 논란이 불거진다.

정치인들은 사고가 터지면 ‘OO이법’이란 이름을 선점하고, 온갖 대책을 끼워 넣은 다음, 절차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안전 반대자’로 매도한다. 그러다 보면 무리하다 싶은 내용까지 들어가는데, 음주운전 가중처벌을 규정한 윤창호법은 헌법재판소 위헌 판단을 받았다. 민식이법은 합헌이었지만, 과실범에게 지나친 형을 부과한다는 논란이 이어진다. 안전펜스 등의 인프라 구축, 스쿨존 불법주차 단속 등의 실효성 있는 대책 대신, 운전자 엄벌을 통해서만 입법 목적(어린이 안전)을 달성하려 한다는 비판도 있다.

지금 정치권은 ‘하늘이법’ 만들기에 열중이다. 정신질환 교사의 직권 휴직, 폐쇄회로(CC)TV 설치, 학교전담경찰관(SPO) 대폭 증원, 저학년 동행 하교 등의 대책이 들어갔다. 그러나 실효성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걸 찾기 어렵다. 의견 수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신질환 낙인 부작용은 어떻게 막나? 정말 CCTV 부재가 이번 사고 원인인가? 학교마다 경찰관을 두면 교사 범죄를 예방할 수 있나? 경찰관은 위험교사의 교권을 언제부터 얼마만큼 제한할 수 있나? SPO가 효과적이라면 가정폭력엔 왜 쓰지 않나? 의문이 뒤따른다.

생을 더 살지 못하고 ‘법 이름’으로만 남은 아이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어린이 이름을 쉽게 갖다 쓰는 입법 선정주의만큼은 경계해야 한다. 하늘이 이름을 법에 붙이는 것처럼, 하늘이법이 교육 현장을 어떻게 바꿀까 예측하는 일도 중요하다. 피해자 이름을 붙인 법이 헌재 결정으로 폐기되거나 상당수 사람들에게 악법의 기억으로 남는다면, 소중한 희생의 가치는 그만큼 퇴색될 게 분명하다.

이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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