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의 애보리진 흔적

시드니 본다이비치는 도심과 가까워 현지인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다. '본다이'는 원주민 언어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라는 의미다. 그 바위 언덕에 지금은 노천 수영장이 들어섰다.
“저 먼 하늘 아래 내 조상의 땅이 흐르네. 강물을 노래하듯 옛 이야기 전해오는 곳. 모래 위에 새긴 발자취, 바람에 실린 목소리, 별들이 비치는 밤에 내 영혼은 그곳으로 돌아가네.” 호주 원주민 출신 맹인 가수 구루물(Gurrumul)의 대표곡 ‘위야둘(Wiyathul)’의 노랫말이다. 그의 부족 언어여서 알아듣기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잔잔한 기타 반주에 실린 목소리에서 느낌은 그대로 전달된다. 뮤직비디오에는 호주를 대표하는 명소 대신 바람에 가녀리게 흔들리는 풀잎, 대지를 달군 뜨거운 태양이 담담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담겼다. 있는 듯 없는 듯 사그라진 호주 원주민의 운명을 닮았다. ‘Wiyathul’은 ‘내가 뿌리내린 곳’, 곧 마음의 고향이다.
원주민의 영혼이 깃든 숲, 베리아일랜드 보호구역
시드니 여행객이라면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를 놓칠 수가 없다. 규모가 워낙 압도적이고 모양이 독특해 다리에 오르거나, 공연장 내부에 들어가지 않아도 저절로 보게 된다. 유람선과 여객선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서큘러키를 중심으로 해안을 산책하면 세계적인 두 건축물이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된다. 영국인이 처음 정착한 록스에서는 좌우로 보이고, 로열보태닉가든 끝자락에서는 오페라하우스 뒤로 하버브리지가 겹쳐 보인다.

영국인이 처음 정착한 시드니 록스의 오래된 건물 사이로 하버브리지가 보인다.

관광객들이 하버브리지 등반 투어를 하고 있다.
이들 명소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시드니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주를 당연히 백인의 나라로 인식한다. 사실 호주에서 외관상 원주민이라 여겨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곱슬머리에 전통 문신을 새기고 거리 공연을 하는 악사를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 원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버브리지 건너 북측 베리아일랜드(Berry Island) 보호지역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는 시드니 서큘러키 해변 어디서든 돋보인다.

예비 신랑 신부가 시드니 로열보태닉가든에서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배경으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다.

로열보태닉가든 해변에서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겹쳐 보인다.
호주 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길게 잡아 6만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특정 지역에 원래부터 거주해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흔히 애보리진(Aborigine)이라 부른다. 애보리진은 일개 부족이 아니라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닌 여러 갈래의 사회 집단이다. 원주민 문화 체험을 주관한 현지 여행사(splendourtailoredtours.com.au) 가이드는 베리아일랜드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천 조각을 오려 붙인 것처럼 알록달록한 호주 지도를 꺼내 보였다. 마치 오밀조밀하게 국경을 맞댄 유럽 지도와 흡사하다.
영국인이 상륙하기 전 호주 대륙에는 약 250~500개의 독립된 사회와 언어 집단이 존재한 것으로 학계는 파악하고 있다. 현지 가이드는 이들 집단을 부족이 아니라 국가(Nation)라 표현한다. 1788년 유럽인이 정착한 이후 원주민의 90% 이상이 학살, 질병, 강제 동화정책 등으로 사라졌고,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10여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시드니 도심 북쪽 베리아일랜드에는 원주민 부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숲 탐방을 겸한 원주민 문화 체험이 진행되는 곳이다.

베리아일랜드 보호구역에서 원주민 해설사가 유칼립투스 진액과 그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베리아일랜드(실제는 육지와 가늘게 연결된 작은 반도 지형)에 도착하자 원주민 여성 해설사 키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부색이 조금 진한 것을 빼면 백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 외모였다. 골드코스트를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한 번줄랑(Bundjalung) 부족 어머니와 유럽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베리아일랜드는 캄머레이갈(Cammeraygal) 부족의 근거지였다. 원주민 문화 체험은 섬 가장자리로 연결된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약 1시간 30분간 진행된다. 먼저 팔뚝에 하얀 가루로 전통 문신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료는 사암 조각을 문질러 나온 가루(오크레·Ochre)에 물을 조금 부어 만든다. 부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베리아일랜드 보호구역의 원주민 문화 체험은 몸에 전통 문양으로 회칠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베리아일랜드 보호구역에서 해설사가 원주민이 약재와 식용으로 이용한 다양한 열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입구의 조개무지 흔적을 지나 본격적으로 숲 탐방에 나선다. 유칼립투스가 높이 자라고 다양한 관목이 바닥을 덮고 있는 숲이다. 원주민은 이 숲에서 생활에 필요한 위생용품과 약재, 식재료를 얻었다. 체험은 그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지혜를 엿보는 과정이다. 껍질이 벗겨진 유칼립투스에서 응고된 진액을 따서 맛본다. 조금 텁텁하면서도 살짝 단맛이 느껴진다. 치통과 설사에 효과가 있고, 설탕 대용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코알라 먹이로 알고 있는 유칼립투스는 무려 800여 종류에 이른다. 항균, 해열 등 효용도 그만큼 다양하다.
잎 하나에 오렌지 50개에 해당하는 비타민C를 함유하고 있다는 사르사파릴라도 있다. 효능이 뛰어나 영국인들이 괴혈병 치료제로 썼다는 식물이다. 아이들이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는 야생 배, 신맛이 아주 강한 핑거라임 등 숲이 주는 다양한 과일을 맛보며 이동하니 지루할 틈이 없다.

베리아일랜드 보호구역 유칼립투스 나무에 대형 벌집이 매달려 있다.

베리아일랜드 원주민 문화 체험은 전통 나무 용기(쿨러먼)에 숲이 주는 다양한 선물을 맛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탐방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비누 효과를 내는 나뭇잎을 비벼 손을 씻은 후 쿨러먼(Coolamon)이라는 나무 용기에 숲의 선물을 조금씩 담아 시식한다. 나뭇가지를 파서 만드는 쿨러먼은 크기에 따라 음식을 담는 그릇도 되고, 아기를 달래는 요람이 되기도 한다. 한적한 언덕에서 보니 바다 건너 시드니의 스카이라인이 솟아 있다. 키라는 고층 건물이 없었던 230여 년 전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권했다. 눈을 감으면 찰랑거리는 파도, 사각거리는 바람 소리만 스친다. 자연에 감사하며 살아가던 원주민의 일상이 구루물의 선율처럼 평화롭다.
곳곳에 원주민의 영혼, 타롱가동물원과 본다이비치
인근에 타롱가동물원이 있다. 도심 가까이 자연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녹지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동물원은 비스듬하게 경사진 산자락을 활용했다. 지그재그로 난 탐방로는 곧장 어두컴컴한 숲으로 이어진다.

타롱가동물원 탐방로에 'NURA DIYA'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곳 원주민 언어로 '땅을 따라 걷는 여정'이라는 의미다.

타롱가동물원의 캥거루가 등을 긁고 있다.

코알라는 타롱가동물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다.

타롱가동물원의 아기 코알라가 엄마 품에 안겨 있다.
기린, 코끼리, 사자, 침팬지 등은 이곳이 아니라도 볼 수 있는 동물이다. 탐방객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캥거루, 웜벳, 왈라비, 에뮤 등 호주 대륙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물에게 쏠린다. 그중에서도 코알라 구역이 단연 인기다. 고목에 잠자는 듯 매달린 코알라가 이따금 눈을 뜨거나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면 여기저기서 조심스러운 탄성이 새나온다.
탐방로 곳곳에 ‘NURA DIYA’라는 팻말이 보인다. 시드니 지역 원주민 다루그(Dharug)족 언어로 ‘땅을 따라 걷는 여정’이라는 의미다. 자연을 대하는 원주민의 철학과 삶의 지혜를 존중하는 표현이다. 탐방로가 거의 끝나는 지점의 광장에 다다르면 다시 바다 건너 시드니의 고층 건물이 조망된다. 숱하게 보아온 풍경이 신기루처럼 익숙한 듯 낯설다. ‘타롱가(Taronga)’는 에오라(Eora)족 언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곳’ 또는 ‘아름다운 전망’을 의미한다.

시드니 북측 한적한 해변 발모럴비치.

발모럴비치 북측 해안에 기하학적 문양의 퇴적층이 드러나 있다.
동물원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발모럴비치(Balmoral Beach)는 현지인이 가족 단위로 즐겨 찾는 해변이다. 규모가 크지 않고 사람도 많지 않아 한적하고 오붓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해변 북측 끝자락에는 파도에 깎인 퇴적층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저택이 들어선 해변 언덕은 시드니의 부촌이다. 현지인이 주로 이용하는 바닷가 식당에서 여유와 풍요로움이 묻어난다.
시드니의 대표 해변은 누가 뭐래도 본다이비치(Bondi Beach)다. 시드니 중앙역에서 불과 7km 떨어져 있어서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도 즐겨 찾는다. 폭 100m에 길게 휘어진 해변은 항시 붐비면서도 여유가 묻어난다. 모래사장으로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들어 서핑에 적합하고, 해변 뒤편 넓은 잔디밭에서는 자리를 깔고 일광욕을 즐긴다. 남쪽 바위 언덕 아래에는 바다와 맞닿은 노천 수영장이 들어섰다. 파도가 들이치는 사계절 물놀이 시설이자 인증사진 명소다.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를 두루 갖췄으니 시드니 시민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해변이다.

본다이비치는 시드니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해변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에 노천 수영장이 들어섰다.

시민과 여행객이 시드니 본다이비치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다. 시민과 여행객이 시드니 본다이비치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다.

여행객이 본다이비치 한 귀퉁이 물웅덩이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다.
‘본다이(Bondi)’라는 지명 역시 다루그 원주민이 불러온 이름이다.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라는 뜻으로 지형적 특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시드니 주변에는 이곳 외에도 파라마타, 울런공, 울루물루 등 원주민이 오랫동안 쓰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지명이 수두룩하다.
2008년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는 정부의 원주민 탄압정책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역대 정부와 의회가 정책적으로 원주민들에게 깊은 슬픔과 고통을 안겼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영국인이 호주에 발을 들인 지 220년이 지난 뒤였다. 본다이 해변에 맑은 바람이 불고, 뜨거운 햇볕이 부서지고, 하얀 파도가 밀려든다. 변함없는 대지와 바다가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진다.
●취재 협조 호주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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